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겉으로는 로맨틱 코미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깊숙히 살펴보면 뉴욕 상류층의 삶과 그들이 느끼는 공허함이 세밀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중상류층 인물들의 삶 속에서 느껴지는 지루함과 허무함, 그리고 그 흐름이 어떤 장면으로 표현되는지 살펴본다. 동시에 관객이 느끼는 감상까지 함께 분석하며 영화의 본질적 메시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상류층 인물의 삶이 주는 감정적 거리감
영화 속 주인공 개츠비는 뉴욕 상류층 출신이지만, 자신이 속한 계층에 끊임없는 회의감을 느낀다. 도박에 재능이 있는 그는 끊임없이 도박장을 찾고, 술과 담배를 놓지 않는다. 돈과 술과 담배 모두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끼는 그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의 주변에는 화려함이 넘쳐난다. 높은 빌딩, 고급 호텔, 예술적 취향을 과시하는 파티, 그리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듯 굴러가는 상류층 특유의 여유로움.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모가 가진 부를 마음껏 누리기보다 그들의 고상한 취미를 경멸한다. 그들의 그늘 아래에 있지만, 오히려 그들의 삶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돈다. 그는 그 화려함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 어울림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여기서 영화는 상류층의 삶이 단순히 부유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규칙과 기대에 부응해야만 하는 그들만의 삶의 모습도 보여준다. 개츠비는 원하는 것을 향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고, 항상 주변의 시선과 집안의 기대가 따라붙는다. 특히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은 그를 더 옥죄어 오는 부담으로 그려진다. 이런 억압은 외면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대사와 표정,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따. 특히 영화 초반부, 비가 내리는 뉴욕 거리를 혼자 걸을 때의 개츠비의 모습은 상류층이라는 신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고 외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화려한 도시 한복판에서조차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되어있다. 개츠비의 삶을 통해 영화는 상류층의 화려한 이미지 뒤에 숨은 무력감과 정체성 갈등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부의 문제를 넘어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로서, 한 인간의 삶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챈'(셀레나 고메즈) 과의 만남을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허와 허무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영화
영화는 허무함이라는 정서를 단순히 인물의 대사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 특유의 연출 방식은 대화, 배경음악, 카메라 앵글, 조명과 같은 다양한 영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인물 내면의 공허함을 시각적이고 감정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비 오는 뉴욕’이라는 배경은 의도된 장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눈물이 가리워지고, 모든 소음이 빗소리에 감추어진다. 빗 속에서 하염없이 애슐리를 기다리며 뉴욕을 걸어다니는 개츠비가 빗속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알 수는 없다. 또한 너무나 많은 소음에 휩싸인 뉴욕이라는 도시에서도 비가 올 때면 비오는 소리에 모든 소리가 작아지거나 소리를 감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츠비는 오히려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다.
영화는 인물 간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조를 통해 ‘대화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화려한 언어와 재치 있는 농담 속에서 인물들이 실제로는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는 등 군중 속 고독이 느껴진다. 카메라 워킹 역시 이러한 허무함의 정서를 강조한다. 인물들이 혼자 있는 장면에서는 넓은 공간에 대비해 인물의 실루엣을 작게 잡아 외로움을 극대화하고, 반대로 사람들로 붐비는 공간에서도 정중앙을 비우는 구도를 사용해 인물의 ‘감정적 고립’을 표현한다. 이러한 연출은 허무함을 구체적이고 생생한 감정으로 만든다.
감정선이 가리키는 인생의 지루함과 선택의 무게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개츠비의 감정선은 점점 더 현실을 깨닫게 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는 자신이 애슐리를 순수하게 사랑했다고 믿었던 감정이 사실은 환경과 상황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이 속한 상류층 세계가 더 이상 자신을 안정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자유를 빼앗는 공간으로 느껴진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된다. 이는 영화 후반부의 자신의 어머니가 성공한 삶을 강조하고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고집하는 이유를 알게 되면서 더욱 선명해진다. 이러한 감정 변화는 단순히 사랑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삶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영화가 전달하는 지루함은 무료함의 감정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때 쌓여가는 피로감에 가깝다. 개츠비는 자신의 삶을 바꿀 기회를 여러 번 마주하지만, 상류층이라는 신분의 굴레, 가족의 기대, 사회적 시선에 부딪혀 나아가지 못한다. 영화는 이를 통해 삶의 지루함이 단지 반복되는 일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개츠비는 비 오는 뉴욕 거리에서 다시 홀로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초반과 달리 더는 혼란스럽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며 앞으로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새로운 사랑이 시작됨에 따라 자신감이 붙은 개츠비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를 벗고자 하는 의지와 자유로울 수 있는 결심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상류층의 화려한 삶 이면에 존재하는 고독과 허무함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개츠비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선택의 순간에 마주하는 인생의 지루함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이는 상류층이라도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허무를 직접 마주하고 채워나갈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함을 보여준다. 개츠비는 마지막에 애슐리를 급히 떠나보내며, 자신의 삶은 어떻게든 뉴욕에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보일 수 있으나 결국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한 발짝 내딛은 개츠비의 용기를 보여준다.